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칠리아 왕국 (문단 편집) ==== 중세 초기 이탈리아의 정세 ==== [[파일:lombard_invasion_by_hillfighter-d36z14u.png]] 7세기 초반 이탈리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는 [[오도아케르]]의 지배를 받다가 [[테오도리크 대왕]]이 오도아케르를 제압한 뒤 [[동고트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을 받든 [[벨리사리우스]]의 침공으로 발발한 [[고트 전쟁]]이 553년 [[환관]] 장군 [[나르세스]]가 [[토틸라]]를 꺾고 동고트족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이탈리아 전역은 동로마 제국에 수복되었다. 그러나 18년간 이어진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황폐화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바닥을 드러낸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이탈리아인들에게 과중한 과세를 매기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게다가 [[사산 왕조]]와 아바르족의 침략으로 정신없던 터라 이탈리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568년 [[알보인]]이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로 진군했을 때, 동로마 제국의 가혹한 착취에 이골이 난 주민들은 동로마 제국을 위해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고, 현지에 주둔한 동로마군 역시 수적인 열세와 사기 저하, 통합된 지휘관 부재, 본국의 지원 미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결과, 랑고바르드족은 파비아를 3년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킨 것을 제외하고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이탈리아 북부를 순조롭게 공략했다. 알보인은 토스카나에 거점을 삼고 36개의 공국을 점령지 곳곳에 신설했다. 공작들은 왕에게 공물을 바치고 전시에 왕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합류할 의무를 준수하는 한 자기 영지에서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알보인의 휘하 귀족들은 좀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스폴레토]]와 [[베네벤토]]에 독립 공국들을 세웠다. 다만 랑고바르드족은 공성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로마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라벤나, 나폴리,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베네치아 등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는 랑고바르드 족이 세운 [[랑고바르드 왕국]], [[라벤나 총독부]]로 대표되는 동로마 제국의 잔여 세력, [[교황]]이 근근히 버티는 로마로 나뉘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이탈리아 내 동로마 세력을 압박해 6~7세기 동안 카푸아, 살레르노, 크로토네 등의 도시를 공략했다. 663년 동로마 황제 [[콘스탄스 2세]]가 친정해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 했지만 격퇴되었고,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과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압박, [[성상 파괴 운동]] 등으로 인한 국내 혼란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이탈리아에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못했다. [[파일:lombard_italy_by_hillfighter-d371keu.png]] 8세기 중반 이탈리아 결국 751년 라벤나 총독부가 [[아이스툴프]] 왕이 이끄는 랑고바르드군에 함락되면서, 그 때까지 동로마 제국에 기대고 있던 교황은 더 이상 제국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아이스툴프가 여세를 몰아 로마 시 인근 요새들을 공략하며 강하게 압박해오자, 교황 [[스테파노 2세]]는 754년 1월 6일 [[프랑크 왕국]]으로 찾아가서 [[피핀 3세]]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일전에 교황이 [[메로빙거 왕조]]를 밀어내고 자신이 프랑크 왕이 되는 걸 용인해준 적이 있는 데다 교황이 랑고바르드 왕국의 가신이 되는 걸 막고 싶었기에, 피핀 3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기로 했다. 755년 봄, 피핀 3세는 알프스 산맥으로 진입해 수사 계곡 요새에서 랑고바르드군을 상대로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아이스툴프는 파비아로 도망쳤지만 프랑크군에게 포위되었다. 이어진 평화 협상 끝에, 755년 6월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이스툴프는 랑고바르드 왕국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인질을 넘기며, 자신이 빼앗았던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피핀 3세가 철수한 후, 그는 군대를 재정비한 후 756년 1월부터 3월까지 로마 공방전을 전개했다. 알프스 산맥을 겨울에 넘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에, 프랑크군이 산맥을 넘지 못하는 사이에 로마 시를 함락시켜서 모든 걸 끝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 시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의지하며 끝까지 저항한 수비대와 시민들 때문에 함락되지 않았고, 아이스툴프는 4월 초 포위를 풀고 파비아로 돌아갔다. 한편 피핀 3세는 아이스툴프가 약속을 어겼다는 소식을 듣고 4월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아이스툴프를 또다시 격파하고 파비아에서 포위 공격했다. 아이스툴프는 결국 756년 6월 항복하고 훨씬 가혹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이번에는 일전에 점령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이 아니라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로 돌아가야 하고, 더 많은 인질을 프랑크 왕국에 보내야 했으며, 상당한 배상금을 프랑크 왕국에 지불해야 했다. [[파일:frame-modena-italy-map.jpg]] 피핀은 랑고바르드 왕국을 물리친 뒤 그들로부터 탈취한 영토를 교황청에 기증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를 가운데에서 가로지르는 [[교황령]]이 탄생했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마지막 국왕 [[데시데리우스]]는 친 프랑크 성향을 보이는 교황 [[하드리아노 1세]]와 갈등을 벌이다 772년 말 로마 인근의 여러 마을을 공략한 뒤 로마 시를 포위 공격했다. 하드리아노 1세는 데시데리우스를 [[파문]]하고 프랑크 국왕 [[카롤루스 대제]]에게 구원을 요청헀다. 774년,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군이 남하하여 교황령을 회복시키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수도 파비아를 함락시키고 데시데리우스를 생포했다. 이리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킨 프랑크 왕국은 여세를 몰아 남부 이탈리아로 남하하여 [[스폴레토 공국]]을 속국으로 삼았다. [[베네벤토 공국]]은 이에 맞서 항전하며 랑고바르드 왕국의 후예를 자처했으나, 786년 교황령을 공격했다가 교황의 구원 요청을 받은 카롤루스 대제가 787년 베네벤토까지 쳐들어오자 결국 굴복하여 스폴레토 공국과 함께 프랑크 왕국의 봉신이 되었다. 788년 [[데시데리우스]]의 아들 아델치스를 앞세운 동로마 군이 베네벤토 공국을 공격했지만 프랑크-롬바르드 연합군에게 격퇴되었다. 하지만 베네벤토 공국은 프랑크 왕국과 거리가 멀다는 이점을 살려 수시로 반기를 들었고, 카롤루스 대제는 이들을 상대로 791년, 792 ~ 793년, 800년, 801년 원정을 잇따라 단행했지만 결국 그들을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다. 한편, 800년 성탄절에 서로마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른 [[카롤루스 대제]]는 802년에는 동•서로마의 제위를 합치고자 동로마 여제 [[이리니]]에게 청혼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측에서 거부하자 805년 ~ 807년, 810년 ~ 812년에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양 제국 간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동로마가 카롤루스를 '프랑크인의 황제'로 인정하며 일단락되었다. [[파일:Southern_Italy'_States_Ninth_century.svg.png]] 베네벤토 공국에서 떨어져 나온 살레르노 공국 814년에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후 [[프랑크 제국]]의 입김은 약해졌고, 베네벤토 공국은 [[지카르드]](832년 ~ 841년)의 지휘하에 838년에 일시적으로나마 [[아말피]]를 점령하고 [[나폴리]]에게서 조공을 받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지카르드가 암살당한 후 10여년간 내전이 일어났고, 지카르드의 동생인 [[지코눌프]]가 [[살레르노 공국]]을 수립하며 독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